인터뷰 장소 <서교예술실험센터>
1.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희곡 쓰고 연출도 하고 있는, 연극하는 예술가 정진세입니다.
작년에는 서계동에 있는 한 극장에서 극동 시베리아로 순례를 떠나는 순례자를 지켜보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이라는 작품을 올렸습니다. 11월달에 공연을 시작해서 약 한달정도 공연을 했었네요.
2. 홍우주 설립 초창기 조합원… 어떤 계기로 홍우주와 함께 하게 되신건가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사실 이 질문에 답만 4시간은 얘기할 수 있는데, 아주 짧게 얘기를 하자면 홍대앞에 있는 동료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같이 하지 않을수 없게 된 거죠.
그때 제가 자주 드나들던 곳이 여기 홍대 앞이었는데요, 당시 서교예술실험센터가 종료되고 공간이 문을 닫는다는 예고가 있었어요. 그 사건을 기점으로 홍대앞 주체들이 시장과 직접 대화를 하기도 했고요. 그걸 계기로 홍대 앞에서 활동하는 문화예술인들의 유의미한 네트워크를 형성해야 된다는 의견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홍우주의 전신이 될 만한 모임이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홍대앞 문화연구 모임에 속해있었고요. 그 과정에서 홍우주의 창립을 옆에서 지켜보고 응원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제가 젊었고 공의로운 일에 관심이 많아서(웃음) 어떤 계기로 함께 했다기보다는 당연하게 홍대 앞의 젠트리케이션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을 억압하는 혹은 다양성을 침해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맞서는 힘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했었던 것 같습니다.
3. 홍대앞 과는 어떤 인연이 있으신가요?
유년기 시절의 인연과 청년기 시절의 인연 이렇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저는 인터뷰하고 있는 이 공간(서교예술실험센터) 바로 옆에 있는 배영 유치원 졸업생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자랐던, 그러니까 서교시장 앞의 흙바닥에서 장난치고, 골목에서 아이들과 놀던 어린이였었죠. 실제로 홍대앞 놀이터에서 미끄럼틀 타면서 놀았고, 서교국민학교에 입학했던 동네 주민이었어요. 90년대 초중반에 시각 예술가들이 작업실을 내고, 날라리 같은 음악 밴드들을 거리에서 마주칠때, 이를 심히 걱정하던 어린이였었죠. (웃음)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면서 홍대앞을 떠났다가 2005년 청년 시절에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을 하게 되면서 다시 여기를 찾게 되었어요. 화려하기만 해서 멀리했던 홍대앞에 진면목, 그러니까 예술적인 것과 대중적인 것이 공존하는 모습을 보고 다시 매력을 느끼게 됐죠. 어쩌면 저한테 홍대앞은 취향의 문제이기보다는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 기억이 담긴 ‘재발견된’ 고향 같은 공간이에요.
4. 홍우주 단체가 벌써 10년을 바라보고 있어요! 초창기 조합원으로서 홍우주에 기대하는 것이 있으신가요?
사실 9년이면 굉장히 오랜 기간인데 약해지거나 소멸되지 않고 잘 버텨주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대단하다고 생각이 들어요.
홍대 앞에 문화 예술 네트워크가 홍우주만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그전에도 홍대 앞이라는 이름을 내건 단체들이 있었는데, 홍대 앞에서 만들어진 예술적 경험이나 문화적 자산을 은근히 독점하고 개인의 이력화하려는 의도가 적지않게 있었죠. 결국 그런 홍대앞에 대한 도구화가 결과적으로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더 자괴감과 무력감을 주었던 것 같아요. 그런 모습에 대한 성찰로 홍우주는, 이제는 그러지 말자라는 취지가 초창기부터 있었던 것 같아요. 좀더 정치권력 지향적이나 영향력 중심으로도 갈 수도 있을텐데, 혹은 선배들의 전철을 밟을수도 있었을텐데, 여전히 조합원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민주적인 절차를 밟아가면서, 실패도 하고 수습도 하면서 여기까지 온 홍우주가 아주 멋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이 현재의 홍우주와 딱 맞는 상황이지 않나 싶어요.
5. 지금 하고 계신 일에 대해서 간단하게 소개 부탁드립니다.
제가 하는 활동은 코로나 이전에는 크게 비평, 축제, 정책, 창작, 분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연결되는 지점들이 있어서 이렇게 다양하게 분야에서 활동하는 것이 개인적으로도 재밌었어요. 다만, 2020년대 들어오면서 지금은 주로 창작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희곡을 쓰고 연출을 하는 일이라고 할수 있겠죠.
코로나가 오기 직전 그러니까 2019년도까지는 활발하게 제가 속해있는 지역, 장르 등에 도움이 되는 정책이라든지 새로운 플랫폼을 만드는 일에 열중했었어요. 나름의 큰 계획과 전망도 있었고요. 그런데 코로나로 인해 연결망이 닫히면서 기세도 꺽이고, 스스로 포기하게 된 것들도 많아요. 그렇게까지 주저앉을 일도 아닌데, 돌이켜보니 맥이 완전히 풀렸었던 거 같아요. 젊은 시절의 막판이라서 그랬는지 굉장히 애썼는데 아주 허망하게 중단되어서 힘들었죠. 지금은 조금씩 다시 마음을 다잡고 있습니다. 대단한건 못하겠지만 주제에 맞는 소박한 활동은 할수 있을것 같아요.예술생태계에 필요한 일들이겠죠.
6. 비평과 창작이 밀접하면서도 굉장히 상반된 개념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요.
일단 시간적으로 비평은 사후에 일어나는 일이고 창작은 비평 이전에 사전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성격이 좀 다르죠. 제가 하는 창작은 언어를 다루는 연극이다 보니까 어떤 사건이나 어떤 이야기에 대한 비평적 관점을 가지고 재창작하는 성격도 있어서 연결되기도 해요.
둘의 관점 차이를 얘기를 해보자면 비평가는 좀 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근거가 중요해요. 그리고 근거라는 것을 만들기 위한 어떤 논리가 중요한 반면에, 창작은 감각이나 비논리 같은 게 중요하죠.. 근데 그 비논리라고 해도 결국에는 창작의 논리로 수렴은 되겠지만요.
기존의 관점으로 해석되지 않는 어떤 새로운 문법 작법 이런 것들을 만드는 쪽이 창작인 것 같고, 비평은 그걸 해석하거나 그것을 해석했을 때 모자람이 있을 때 그걸 지적하거나 아니면 충분함이 있을 때 그걸 칭찬하거나로 구분되어 지는 것 같아요.
7. 최근에 올리셨던 작품 <극동 시베리아 순례길>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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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배경을 ‘산티아고 순례길’ 이 아닌 ‘시베리아 순례길’로 선정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유럽 아시아 대륙 지도를 보면 제일 서쪽 끝에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어요. 그래서 대체로 순례길 방향이라고 하면 서쪽을 상상하죠. 그리고 보통 순례자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속죄와 구원을 받기 위해 걸어요. 그렇다면 산티아고와 정반대에 위치한 시베리아는 코로나 이후 어떤 문명에 대한 반성적인 차원에서 종교 또는 구원, 자기 안식 같은 가치들을 오히려 부정하면서 고행을 떠나는 마음으로 순례를 떠나면 어떨까 생각 했었던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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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가 시베리아 순례길을 걸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극 중 순례자가 처한 상황은 반려자도 죽고 반려동물도 죽고 완전히 혼자 남은 존재가 돼요. 일종의 자기 상황이나 자기가 처한 세계에 대한 저항과 반발로 시베리아를 간 걸로 설정을 했어요. 시베리아 순례길이 단순한 여행 차원에서 갈 수는 없을 정도로 고되기 때문에 그런 고됨 또는 죽음까지도 무릅쓸 만한 이유가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랑하는 사람이 상실됐을 때 그 마음이면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이건 배우들과 공유했던 상황이었고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하는 다른 극중 인물들 또는 관객들은 그 이유가 무엇일지 상상하고 추정하며 극이 진행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8. 한국 사회의 비판을 담은 연극들을 많이 작업하셨는데, 연극을 통해 전하고 싶은 것, 연극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있다면 무엇인가요?
제가 창작자로 성장하던 시기가 이명박근혜 시기로 불리던 암흑기여서 의도치 않게 회의적이고 비판적인 예술가가 된 것 같아요. 블랙리스트 사건과 미투운동을 겪었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이 더 크게 담기게 되었고요. 내가 좋아하고, 즐기고,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가치들이 2010년대의 변화로 인해서 퇴색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활동을 하다 보니까 피할수 없이 부정적인 예술이 돼버렸죠. 저 스스로는 여전히 사회 참여적인 작가는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재미있고 즐거운 연극을 하고 싶어해요.
연극을 통해서 전하고 싶은 게 있다면… 제가 주로 연극에서 한국이 소멸하거나 혹은 어떤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에 대한 얘기를 주로 하는데요, 그렇다는 건 결국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바람 같은 거겠죠. 망할때 망하더라도 다양성과 개별적인 목소리들이 존중을 받는, 작고 어린 존재들에 대한 생존과 인정 그런 것들만이 오롯이 남아있어야한다는 메시지가 있어요.
9. 정진세? 정진새? 정진쇠? 다양한 필명으로 활동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본명은 정진세이고요, 새를 쓰는 건 보통 창작할 때 쓰는 이름입니다. 이 두 개의 이름을 쓴지는 오래되었고요, 쇠를 썼던 건 국악 공연을 진행하면서 잠깐 사용했던 이름이에요.
여러 가지 활동명을 쓰는 이유는, 아까도 잠깐 말씀드렸듯이 공공이나 정책, 축제나 비평, 이런 다양한 활동을 하다보니까, 공과 사, 그리고 비평과 창작의 세계를 구분해야 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 영역에 적합한 자아로 활동을 해야할것 같은 의무감 때문이에요. 이걸 동일하게 다 합쳐버리면, 뭐랄까 창작자로 책임져야 하는 순간에 활동가로 방어를 하고, 좀 역량이 모자라는 자아의 경우에는 비교적 우수한 자아로 올려치기 하기도 하고, 또 어떤 공적인 엄밀함이 필요한 자리에서 개인의 예술가성을 드러내면서 은근슬쩍 넘어가고 하는 모습으로 귀결되더라고요. 당장은 인정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걸 구분하지 않으면 분에 넘치는 상황이 올것 같아요. 결국은 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여러 이름과 캐릭터가 필요한 거죠.
10. 2023년 계획은 무엇인가요?
조합비를 잘 내겠습니다.(웃음) 그리고 서울생활문화센터에 있을 때 가보지를 못해서 속상하고요. 올해 계획은 새로 이사한 사무실에 꼭 가보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계획으로는 코로나 3년 동안 너무 작업만 하고 집에만 있어서 지역을 한번 돌아다녀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6월과 11월에 각각 공연이 예정되어 있어서 공연 준비를 하게 될 것 같네요.
2022년이 어린이날 100주년이었어요. 이게 어린이 입장에서 되게 초라하게 지나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아무리 평소에는 외면을 받아도 100주년이나 10주년 이런 때에는 주목을 받아야 되는데…. 어린이에게 책무를 가진 어른들 입장에서도 대충 때우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서, 2023년에 어린이 극을 만들고 싶습니다. 어린이 연극에 대한 플랫폼이라든지 축제 같은 것들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고민 중이에요.
<조합원 인터뷰 공통질문>
배영유치원(서울특별시 마포구 잔다리로6길 11)
11. 홍대앞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을 소개해주세요!
좋아한다기보다는 의식하는 공간이 있는데요, 여기 서교 예술실험센터 옆에 있는 배영 유치원입니다. 제가 그 유치원을 졸업했으니 적어도 40년이 다되었네요. 그 동안 주변에 많은 게 없어지고 바뀌었는데, 계속 남아있어줘서 고맙기도 해요. 여기 서교 예술실험센터와 더불어서 배영 유치원은 제발 없어지지 않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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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에 오실 때 자주 찾으시는 카페나 음식점은 없으신가요?
있었던 곳이 지금은 많이 없어지기도 했고요, 더 이상 그런 낭만을 찾지도 않는 거 같아요. 최근에 자주 가는 곳을 말하자면 제가 강의하고 있는 합정의 말과 활 아카데미 옆에 카페 한(HAN)이라는 곳이 있어요. 저는 거기가 괜히 편하고 좋더라고요.
12. 최근 나를 감동시킨 것은 무엇인가요?
10년 넘게 라이브홀 벨로주에서 새해마다 포크 공연을 진행한 걸로 알고 있어요, 코로나 기간 동안에 새해 공연을 모두 보러 갔었거든요. 더 특별하고 애틋했죠. 싱어송라이터 분들이 다음 주자들에게 자리를 넘길 때 같이 합주를 하는 그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새해 첫날 첫 주간에 포크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과, 홍대앞에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바뀌고 그렇지만, 이렇게 여기서 라이브 음악을 함께 나눌 수 있구나, 찾아오는 사람도 있는 거니까, 이런게 여전히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 기획과 그 공연 자체에 굉장히 감동 받았어요. 연초에 듣는 거라서 그런지, 포크 가수들이 했던 소소하고 작은 멘트들도 기억이 오래오래 남고요.
13. 하시고 싶은 말씀이나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사회적 협동조합이라는 말 자체가 예년과는 다르게 읽히기는 하는 것 같아요. 사회라는 말도 그렇고 협동이라는 말도 그렇고 또 조합이나 우주도 그러네요.
모두가 힘들고 최악인 시간을 보내다 보니까, 지금 이런 때야말로 홍우주의 존재가 더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어요. 언젠가 반드시 어떤 (희망적인) 순간이 온다. 이런 얘기는 못하겠지만, 늘 그래왔던 것처럼 더 큰 영향력이나 더 큰 명분을 가지려고 애쓰기 보다는 이렇게 조합원에게 질문해 주시고 이야기를 듣는 것, 여리고 작지만 당사자인 사람들에게 관심을 주고 지지를 받는다는 그 자체가 저는 휼륭하다는 생각이 듭니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