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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 인터뷰 - 김성섭

분류
조합원 인터뷰
인터뷰 일시
2018/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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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결정하고 함께 책임지는 1/n 정신 - 김성섭
간단히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우리동네 나무그늘 협동조합 이사를 하고 있습니다 전이사장이었구요. 협동조합에서 온갖 잡일을 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협동조합을 좋아합니다. 다중지성에 대한 믿음을 실현하는 공간으로 협동조합에서 1/n 정신을 구현하고 싶습니다."
나무그늘 협동조합 좀 자세히 소개해 주세요.
“이제 7년 정도 됐습니다. 처음부터 협동조합으로 시작했는데 협동조합법이 만들어진 후에 등록을 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5년 된 협동조합입니다. 출발은 민주노동당과 관련이 깊습니다. 지역정치를 하려고 했는데 진보정당에서 지역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선거 때 표를 달라고 하는 대상으로만 사고했죠. 구체적으로 지역에 밀착해서 의제를 발굴하고 주민들과 호흡하면서 정치권력을 획득하자는 고민 차원에서 협동조합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어린이 도서관이나 민중의 집 같은 형식이 많았습니다. 저희는 주민들이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려고 까페를 구상했습니다. 들어오는 사람 입장에서 좀 더 당당하고 공간을 주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서비스, 교육, 계몽의 공간이 아니라 수평적 입장에서 서로 교류하는 공간을 상상했습니다. 그래서 되살림 가게를 병행했어요. 까페만으로는 부족해서 물물교환 형식을 빌어 비자본주의적인 관계망이 확대되기를 바랬던거죠. 초반에는 성과를 거뒀고 자연스럽게 주민 사이 관계망도 형성됐습니다. 하지만 되살림 가게는 2년 정도 하다가 그만했어요. 시간이 지나니까 물량이 줄어들고 교환가치도 떨어지더라구요. 대신 그 문제의식은 희망시장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아무튼 초반에는 생활상담센터, 희망트럭 같은 다양한 시도를 많이 했습니다.”
희망트럭은 저도 써봤어요. 친구가 이사갈 때 빌렸었죠.
“꽤 인기가 있었습니다. 홈페이지에서 호평도 받고. 그런데 용달업 하시는 분들에게 항의를 받았어요. 저희만 운영하는 건 상관없지만 이게 롤모델이 되어 여기저기서 트럭을 대여해주기 시작하면 곤란하니까. 그래서 홈페이지에서는 내리고 조합원만 이용하는 방식으로 바꿨습니다.”
까페는 상황이 어땠나요?
“까페는 늘 적자였지만 꾸역꾸역 운영해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민주노동당에서 시작한건데 진보정당이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사람들도 대부분 당적을 놨습니다. 그러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당선되고 마을만들기 사업이 시작되면서 저희도 주체로 나서게 되었죠. 소금꽃마을네트워크라는 주민관계망도 만들었습니다. 이미 지역에 존재하고 있던 다양한 단체를 엮었고 축제를 함께 하면서 제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처음부터 활동지역을 마포로 정했던 건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개인적으로는 공동육아를 위한 어린이집에서 시작했습니다. 94년도인가 그랬는데 처음에는 연남동에서 있었어요. 당시엔 어린이집이 생소한 개념이어서 새로운 대안으로 각광받았죠. 부모들이 직접 모여 함께 육아 문제를 해결하는 모델로 시작했습니다. 저도 껴볼라고 했는데 대기자가 너무 길었어요. 그래서 대기자들끼리 2호를 내보자 해서 95년도에 서교동에 또 다른 어린이집을 개원했죠. 저는 예전에는 목동에 살았어요. 아파트 밀집 지역이라 별로였죠. 아이들이 흙도 만질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렇게 시작된 어린이집도 여러 차례 밀려났습니다. 그러다 공교롭게 두 집이 모두 성미산 마을 쪽으로 밀려온 거죠.”
아 그게 성미산마을 공동체의 시작인가요?
“서울시가 2000년에 성미산을 깎고 배수관을 묻는 공사를 하겠다고 했어요. 공사계획은 30년 전에 작성된 것이고 배수사정은 이미 많이 개선되었는데도 관행으로 공사를 강행하려 했죠. 무엇이 더 중요한가 토론을 했고 공사를 막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싸웠죠. 어린이집에서 시작했지만 성미산을 지키는 과정에서 성미산마을이란 관념이 생겨났어요. 잘 싸워서 백지화를 시켰죠. 처음부터 마을운동 하겠다고 모인 건 아닙니다. 때마침 싸움이 있었고 이제 막 지역을 통한 사회변화라는 생각이 자라나고 있었는데 서로 만난 거죠. 당시에 ‘변혁적 지역활동론’이란 팜플렛도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각자 의제를 가지고 변화를 모색하지만 기성 정치권력은 지역으로부터 표를 얻고 권력을 공고히 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결국 지역이 바뀌어야 권력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 것이죠. 이게 2000년 전후의 사정이었습니다.”
다시 비슷한 질문인데 그 지역이 마포였던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당시 마포에 출판사랑 인쇄소가 많았습니다. 인쇄소는 상암동 등지에 많았죠. 보통 인쇄소하면 충무로를 떠올리는데 거기는 주로 선전물 출판을 많이 하구요 출판용 인쇄소는 덩치가 훨씬 커야 하는데 예전에는 지대가 싸니 마포에 많았습니다. 90년대 후반부터 시민사회단체도 조금씩 늘어났죠. 그러다 결정적으로 홍대가 뜨기 시작했어요. 저 개인적으로는 당산철교 보수공사로 지하철 2호선 합정-당산 구간이 끊어진 게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당시 성수대교 붕괴로 안전문제가 부각되면서 당산철교도 전면 재시공하게 되었죠. 홍대입구와 합정이 2호선 종착지가 된 셈이었죠. 원래부터 문화예술인들이 주로 찾았으나 대중적으로는 아직 한산한 편이던 홍대 일대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어요. 이대-신촌을 찾던 사람들이 점점 홍대로 몰려왔죠. 그러면서 동시에 마포의 색깔도 다양해졌어요.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이면서 새로운 실험을 해보자는 욕망이 생겼습니다. 주민들도 호응했구요. 공동육아를 넘어 지역을 바라보게 됐어요. 방과후 프로그램을 자체적으로 운영해보기도 하고 먹거리 문제로 생협도 고민했죠. 삶에서 생기는 다양한 문제를 지역에서 함께 해결해보려고 다양한 시도를 했습니다. 유기농 아이스크림 가게도 해보고 반찬가게도 내보고 도시형 대안학교도 만들어보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 해결해보는 경험을 한 것이죠. 이 과정에서 성미산마을이란 이름도 많이 알려졌고 이 관계망으로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평가는 전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관점에 따라 제각각이겠죠.”
그런데 나무그늘 지금 위치(염리동)로 오게 된 이유는 뭔가요?
“지역활동은 자연스럽게 주민과 함께하는 생활정치에 대한 욕구로 이어졌어요. 성미산마을에서는 협동력과 자발성을 배웠고 민중의집에서는 진보적 자원을 지역으로 어떻게 모으는가 배웠어요. 앞서 말했듯 평가는 제각각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에너지가 주변으로 흘러넘쳐 좋은 영향을 미쳤는가가 그 공동체의 우수성을 평가하는 지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에너지로 다른 시도를 해보기로 했는데 마포를 벗어나기는 어렵고 해서 마포 안에서 저소득층이 밀집되어 있고 아파트가 많지 않은 곳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염리동을 찾게 됐죠. 이제는 염리동도 아파트 가득한 공간으로 변했고 원주민들은 대부분 밀려났죠. 그래서 결국 자산화라는 고민까지 왔습니다. 홍우주와도 만나게 된 것이구요.”
홍우주와관계는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지역활동이 대개 그렇지만 상호가입을 통해 응원해주는 것으로 시작하지요. 이전에는 문화예술과 지역활동은 일정한 거리가 있었어요. 개인적으로는 홍대앞 두리반 농성을 한 게 컸습니다. 제 삶에도 큰 영향을 줬죠. 홍대의 변화를 알게 됐습니다. 임대료 문제라든지 라이브클럽의 부침이라든지 공감대를 갖게 되었죠. 재개발, 재건축으로 쫓겨나는 싸움에 함께하면서 두리반을 계기로 교집합이 생겼어요. 노동절에 맞춰 공연했던 51+라는 행사를 통해 인디뮤지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에너지가 엄청났죠. 참여한 당사자들이 가장 놀랐습니다. 그 에너지로 자립음악생산조합이 만들어졌고 정문식 이사장이 함께하던 뮤지션유니온도 알게 되었죠. 여전히 문화예술인들이 함께하는 주체라는 느낌보다는 그들이 함께함으로써 저항이 풍성해진다는 느낌 정도만 갖고 있었어요. 서로 잘 모르니까 부담도 있었죠. 그런데 두리반을 계기로 그 벽이 허물어졌어요. 아 이렇게도 싸울 수 있구나 배우면서 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엄청난 에너지로 현장은 밤마다 흥분상태였습니다. 이때를 계기로 뮤지션유니온도 가입하고 지역과 문화예술 문제를 함께 바라보는 관점도 생겼죠. 그 힘이 자연스럽게 홍우주로 이어졌습니다. 본격적으로 지역과 밀착해서 활동하겠다는 문화예술협동조합이 등장하자 많은 이들이 반겼습니다. 그 덕분에 서로 서로 힘을 얻게 됐습니다. 진보정당(노동당)에 몸담았던 사무국장이 지역 문제를 자기 과제로 받아들인 것도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무그늘 유지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인건비 비중이 큽니다. 공모사업도 수행하고 자체활동도 하는데 재정 때문에 약간은 불완전한 구조입니다. 해마다 공모사업 하지말자고 평가하지만 완전히 놓을 수 없는 구조입니다. 활동가와 상근자들에게 돈을 줘야 하니까. 나무그늘이 이사하기 전에는 손해는 보지 않았어요. 3년쯤 지나니까 안정적으로 현상유지 되는 정도였죠. 그런데 이사 후에 상황이 좀 어려워졌습니다.”
지역자산화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해주세요
“지역자산화 TF를 함께하면서 홍우주와 더 가까워졌어요. 나무그늘이 한 번 쫓겨나는 경험을 하면서 시민자산화를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나무그늘이 쫓겨난 사정을 설명했더니 크게 기사화됐죠. 그러면서 나무그늘이 시민자산화 대표 사례처럼 알려지는가 하면 시민자산화 대회에서 1호로 뽑히기도 했죠. 원래 참가하기로 했던 곳이 펑크가 나면서 대타로 나섰던 것인데요. 아무튼 시민자산화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작년에는 영국으로 해외연수도 다녀왔습니다. 나무그늘만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해서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던 의료생협 36.6도씨, 홍우주와 함께 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자산화 명칭도 지역자산화가 되었죠. 지역의 문제를 자산화라는 형식으로 함께 해결해보자. 지역커뮤니티센터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운영하는 경험을 해보자는 거죠. 홍우주에게는 신흥 협동조합이 갖는 생명력이 있어요. 미래비전도 있구요. 세팀이 연수를 가겠다고 하니 서울연구원도 붙었습니다. 지금도 주위 관심이 상당합니다. 아직까지 자산화에 대한 개념이나 밑그림이라 없다 보니 도대체 뭔가 엄청나게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함께 소유하고 민간이 자율성과 공공성을 획득하면서도 시민/주민에게 개방적인 공간을 만든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다들 궁금한 거죠. 무조건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지역이야기를 많이 나눴는데 아무래도 다가오는 지방선거가 가장 큰 이슈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방선거 이야기를 좀 해주시죠.
“뻔한 이야기인데 권력의 핵심은 의사결정구조에 있어요. 누가 결정하느냐 당사자성이 문제죠. 혜택이든 피해든 당사자가 결정해야 합니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지역정치는 그렇지 않아요. 기존 질서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죠. 한마디로 엘리트가 결정할테니 대중은 그냥 지지하고 따라오라는 겁니다. 우리는 당사자가 결정하는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죠. 주민, 시민, 국민에게 권력이 있다고 선언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게 가능한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투표만 하고 마는 게 아니라 일상적으로 참여가능한 구조를 만들어야 해요. 홍우주가 관광특구를 막아낸 것처럼 실질적 당사자들이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해야 합니다.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지역정치 구조는 아직 하나도 안 바뀌었어요.”
구체적인 지역 현안에는 어떤 게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쫓겨나는 문제가 제일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강제집행, 강제철거를 비롯해 건물주의 이익보장을 위해 폭력적으로 밀어내는 구조를 바꿔야 해요. 임대료 인상 문제도 결국은 당사자들의 지속가능성 문제입니다. 두리반에서부터 공감하기 시작했던 문제의식이 맘상모(맘편히장사하고픈상인모임), 자립음악생산조합, 자산화TF, 경의선공유지 등 다양한 시도로 퍼져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의선공유지만 해도 공공소유 토지인데 대기업에게 30년 개발권을 넘기잖아요. 공공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역시 두리반이 큰 계기가 되었군요.
“무엇보다 그때 배운 것 중 가장 중요한 건 조직운영 방식입니다. 끊임없이 자발적이고 수평적인 관계를 고민해야 합니다. 누군가 끌고 나머지가 따라가는 방식이 아니라 함께 결정하고 함께 책임지는 방식이죠. 나무그늘에서도 조직 문화가 많이 바뀌었고 지금은 의미보다 재미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상대방에게 권위를 부리지 않겠다는 믿음을 주는 게 훨씬 좋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죠.”
권위나 합리성이 무엇인지 사람마다 판단이 달라요. 또 교육받아온 방식도 있고. 함께 경험하는 과정이 중요한데 어떤 노력이 있었나요?
“총회 때 1/n이라고 적힌 카드로 표결을 해요. 사람들이 모두 동등한 관계라는 것을 일상적으로 느끼게끔 하는 거죠. 아무리 훌륭한 리더라도 혼자 끌고 나가면 결과가 좋지 않더군요. 함께 반성하고 꾸준히 모색하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서로 다 반말을 사용해요. 외부에서 볼 때 문제제기가 있을 수도 있어서 토론을 했는데 그냥 다 말을 놓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외부에서도 이상하게 봤는데 조금 지나니 편해지더군요. 언어가 가지는 기본적인 상하관계가 은근히 의식을 많이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홍대 근처에 살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삶과 일터가 상당 부분 일치하는데 어떤 장단점이 있나요?
"장점이 많죠.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아요. 술을 마셔도 좀처럼 취하지 않아요. 편한 사람들과 마시니까. 그런데 최근에 불편한 사람과 술을 마시니 오랜만에 숙취가 오더군요. 일상적으로 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 않습니다. 반면 일은 많아요. 지역활동이든 협동조합이든 품앗이 노동에 기초하고 있으니까요. 주위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받는 것이 많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가끔은 좀 덜 바빴으면 좋겠어요. 그래도 일반회사가 일보다 관계로 인한 스트레스가 훨씬 심한 것에 비추어보면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증명해 보이기 위해 좋은 차와 집을 사지 않아도 되니까요. 머리도 기르고, 수염도 기르고 편하게 살아요.”
마지막으로 홍우주에 하실 말씀 있나요?
“홍우주에 1/n로 참여 못하는 건 사실입니다. 아직은 연대자 관점이 크죠. 나동은 나무그늘 이사로 들어왔는데 나는 그 정도까지는 못하고 있어요. 자산화를 같이 하니까 더 많은 교집합이 생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예술인들이 가지고 있는 뾰족함이 매우 소중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모두에게 수용되었으면 합니다. 홍우주가 무뎌지는 순간 매력이 없지 않을까요? 뭉쳐서 흐리멍텅해 지지 않고 매력이 확대되는 방식이었으면 해요. 주민들에게 모나지 않으나 각자 개성이 살아나는 방식이죠. 각자 색깔을 죽여야 한다면 굳이 같이 하고 싶지 않습니다. 성숙함과 배려가 필요하고 팀웤이 중요합니다. 잘 될 거라고 생각해요. 매력 있는 조직들이 함께하니까. 홍우주 총회를 가보면 조합원이 계속 늘고 있고 의사결정과정을 끊임없이 갱신해 나가는 과정도 발전적이라고 봐요. 변화가능성과 운동성이 있는 조직이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